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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04) - 겐지이야기

인내하는 여성은 꽃으로만 끝나지않는다

정편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는 아름다운 용모와 아버지 천황의 어여쁨을 받았으나 어릴적 어머니를 여읜 마음속 빈공간, 당시 신분높은 남자들이 그러했듯 자신의 저택에 ‘이상향의 여인‘을 들이고 싶어 인연의 여성을 만나는 그가 출가하기 직전까지의 인생얘기로 구성된다. 보통은 이 부분이 부각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겐지의 이야기에서 가장 와닿는 부분은 ‘마보로시’의 권으로, 앞의 영화로운 모습들은 중요한 가치를 잃어서는 그저 인생무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뼈있는 교훈을 남기는 듯 하다.

여기까지는 겐지의 이야기. 겐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상의 여인’으로 느낀건 아버지 천황의 첩인 후지츠보중궁으로, 어머니와 빼닮은 모습에 겐지는 감히 위험한 사랑을 시작한다. 이후의 여성들은 이 후지츠보 중궁을 기준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그중 가장 독보적인건 어릴적부터 자신의 취향으로 키운 무라사키노우에다. 학계에서는 겐지의 이상의 여인을 말할때 이 둘중 누군가에 대해서 분분하다하지만 후지츠보의 금지된 사랑은 죄책감으로 점철되며, 자신의 자식을 자식이라고 말하지 못하게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후지츠보가 출가함으로써 씁쓸한 결말을 맞는다.

반면 무라사키노우에는 초반에 ‘후지츠보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간택당한데다 어린시절부터 친가와 연이 끊어지다시피 했기에 얼핏보면 사랑의 대상이 아닌듯 보이지만, 겐지가 출가에 발목이 잡힐때는 항상 무라사키노우에가 기준이 되었고, 작중 아름다운 무라사키노우에에 눈길을 보낼뻔한 남자도 있었지만 겐지의 선에서 철저히 차단당한다. 온나산노미야와의 혼인을 추진한 일이나(출신이 무라사키노우에보다 좋았다. 다만 그녀를 무라사키노우에처럼 키울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겐지는 점점 마음이 떠나 오히려 무라사키노우에에게 애정을 더 주게되며 이는 어떤 사건으로 이어진다)로쿠조노미야노스도로코의 원령으로 괴로운 무라사키노우에가 출가를 하려해도 끝까지 막는다. 겐지의 영화를 상징하는 로쿠노조인에서 ‘봄의 저택’에 해당하는
곳은 무라사키노우에에게 배정되며 무라사키노우에의 위치가 흔들리자 본격적으로 균형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겐지의 여인들 중에서도 무라사키노우에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며 후에 그녀가 죽자 겐지는 그녀가 자신이 바라던 ’이상의 여인‘임을 깨닫는다. 즉 겐지의 욕심이 도리어 소중한 사람을 고통받게한 셈이다. 이처럼 보면 무라사키노우에는 불행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그녀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왜 그녀만큼은 마지막에 출가한 여인들과 다른 모습을 했을까?

무라사키노우에는 얼핏보면 수동적인 여성으로보이지만 그렇지않다. 겐지는
그녀가 자신이 가르쳤기에 글매무새나 행동거지가 남자처럼 보일걸 걱정할 정도였고, 스마로 유배를 가자 집안을 관리해 신분이 정처가 될수 없음에도 실질적인 처가 되었으며 겐지의 다른 여인이 난 딸을 키워 그 아이로부터 어머니처럼 여겨진다. 다른 여인들마저도 무라사키노우에와 우정을 나눌 정도다. 그녀의 마지막에 대한 묘사는 마치 석가모니가 열반을 들때와 비슷하게 그려진다. 왜 무라사키노우에가 진히로인이라 칭할까? 겐지에게 휘둘리던 여느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결국 실질적으로 겐지가 출가를 마음먹을 정도로, 어쩌면 역으로 그를 휘두르고 있던건 아닐까?

이 책의 첩들에 나온 꽃의 이름은 일본 신화의
코노하나사쿠야히메가 의미히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한시적인 여성의 삶을 의미하는 것처럼보인다. 무라사키를 뜻하는 한자인 자초(지치)는 아름다운 색을 내기도 하지만 약초로도 쓰이는 실용성있는 꽃의 이름이다.
무라사키노우에는 비록 고통받았지만 지지않은 영원한 꽃을 피워낸 유일한 여성인 셈이기도하다.

인내심이 수동적인 자세처럼 여겨지는 현대사회이지만, 사실 세상의 많은 기적은 인내로 이루어지기도한다. 히카루 겐지가 주인공이지만 무라사키노우에가 곁을 떠났기에 겐지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귀족남자의 인생무상이야기가 아닌 당시 상황에 인내해야했던 여성을 숭고하게 만드는 어떤 위로가 아니었나싶다.

사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헤이안 귀족을 떠올리는 운치있는 묘사도 묘사지만 겐지가 사랑하는 여인들과 정원의 경치를 보며 인물들의 정서가 반영된 와카를 읊는 장면이다. 딱히 치밀한 심정묘사가 없어도 간접적으로 둘러표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을 드러내게 한다고 할까.

단순히 겐지의 연애일대기라 생각하면 거기서 끝나겠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을 맛이 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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