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랑하는 영화.
올 한해 마무리를 어떤 글로 할까를 생각했을때 가장 사랑하는 이 글로 하면 좋을 거라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몇번 쓰기를 번복하다가 쓰게 되었다.
0 : 아서 하위처 Jr.의 부고
프렌치 디스패치의 초대이자 마지막 편집장의 죽음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내용도 모르는 잡지는 이 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됨을 알려준다.
왜 그가 죽으면 잡지를 폐간하라 했을까? 50개국에서 보는, 50만부나 팔리는 잡지인데 말이다.
그는 논란거리가 있을 글도, 편집방침에 맞지 않는 글도 '난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라고 전부 실으려한다.
그의 죽음이 잡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왜 이런 은유까지 사용한 것일까?
이는 누가 편집장을 맡은들 그의 필진을
그처럼 신경써줄 사람을 찾을 수없을거라 여긴 판단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만큼 아서는 그 위치치고는 행동이 독특하다. 예산은 신경도 쓰지않고 글에 어떤 내용이 실리든 가급적 살린다. 이는 그가 그들을 존중하고 믿었던 이유는 '좋은 필진'인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필력을 믿은 건지, 그의 시야를 믿은 건지, 혹은 복합적인걸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서의 말을 증명하듯, 필진의 글로 표현되는 옴니버스 영상들은 하나같이
핵심을 찌르는 내용들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마지막 행보는 미련이 없는 것 같이 스스로를 지우는 마무리로 끝난다.
죽는 모습도 자신의 사무실에 그대로 전시되어있다.
말그대로 잡지가 그의 삶의 전부며 소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를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서의 역할이 이 잡지에서, 필진들에게 얼마나 컸나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1. 시작 : 자전거 리포터(새저랙)
새저랙은 자전거를 타고다니며 자신이 본 앙뉘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곳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이 된다.
앙뉘라는 도시는 250년동안 기술자촌에서 시작해 발전을 겪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서는 소외된 자, 우리가
저속하게 여기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들마저 포함한 모든 것이 앙뉘인 것이며, 이 앙뉘의 특징들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존재한다.
새저랙의 글은 한 격언으로 귀결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는 저마다 깊은 비밀이 있다"
All grand beauties withhold their deepest secrets.
우리가 아름답게 여기는 것들에는 소외된 것들이 있다는 해석을 해도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소외된 것들까지 포함한 모든것들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해석이 더맞을 것 같다. 꽃집을 굳이 언급하지 않고 저속한 단어도 그대로 실린 새저랙의 글처럼 말이다.
새저랙은 '독자들이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도시의 모습조차도 아름답게 본다. 말그대로 도시를 이루는 모든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모든 삶이 아름답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2. 예술 섹션 : 모세 로젠탈러와 '시몬'(베렌슨)
모세 로젠탈러는 한때 부잣집에서 지원을 받은 뛰어난 예술가이지만 스스로를 고통속에 밀어넣으며 '정신병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감옥에 탈세로 잡혀온 미술상이 그가 감옥에서 취미로 그린 작품을 보면서 감명받으며 시작된다.
모세의 곁에는 시몬이라는 간수가 있다. 이 간수는 어릴적에 가난해 그림조차 제대로 배운적이 없지만 모세의 뮤즈가 되어주며 그의 예술적 고뇌를 차갑게 이해해준다.
영화는 모세라는 죄수의 죄에 대해서 옹호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가 저지른 죄가
'세탁'이 되는거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세라는 존재를 통해 감독이 저 밑바닥에도 예술은 존재하며, 그 아름다움은 다 끝난것같은 사람도 일으켜세울수도 있다는 걸 말하는 걸로 보였다.
예술은 돈이 되지 않는다. 이게 통용적인 문구다.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을 돈많은 이들의 전유물로만 봐야할까? 예술을 배우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예술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모세 로젠탈러의 그림속에서 예술 그 자체가 된 시몬처럼.
모세는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혐오감'을 일으킬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작중 내비친 혐오는 결국 스스로를 향한 것이고 구강세정제를 들이키는 그의 고백을 듣는다면, 자기혐오를 가졌던 누군가는 그에게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이며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섹션. '예술가는 고통받아야다'는게 아니라 '예술은 어디든 있다'는 것으로 감독은 말하고 있으며 이는 핍박한 삶안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을 수 있는 형식을 벗어난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전부 시몬이야‘
“It’s all Simone”
3. 정치/시 섹션 :선언문(크레멘츠)
심각한 정치얘기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청소년이 자신의 '자유(권리로 표현된다)'를 위해 시위하는 곳에서 크레멘츠라는 기자가 취재를 하는 얘기다.
현 세태에서 가장 공감될 요소가 많이 보이는 섹션으로, 싸움으로 대립하는 대상은 각각
남자와 여자, 청년과 중년이다. 이 갈등은 쓸데없을까?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들에게는 충분히 심각한 일인것처럼 보인다. 군대에가서 죽은 친구를 보고 탈영하거나 첫사랑 남자애에게 일부러 더 시비를 거는, 자유를 찾기위해 쟁취하는 그들의 삶에 밀접한 모든 것들이 과연 정치얘기보다 가볍게 여겨야하는 걸까?
“사과를 받는 법을 배우렴. 그건 중요한 거니까”
“Then learn to accept an apology.
That’s important”
“누구에게 중요한데요?”
“Important to whom?”
“어른들에게”
“Grown-ups”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굳이 '절대성'을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시간마저도 상대적으로 흐른다는데 뒤바뀌는 역사에서 무엇이 과연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크레멘츠가 말하는 것처럼 사회는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장소이고,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싸움을 하고 있다.
정치얘기를 하게 되면 지역, 나이, 성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정치라는건 본디 사회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수만 이익을 얻는게 과연 '정치'인걸까. 우리에게 적이 존재한다면 단 하나뿐이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함께가려는 사회를 방해하는 인식들.
이 섹션에서 이성적이여 보이는 크레멘츠는 제프리와 하룻밤 보낸듯한 연출이 나온다. 앞의 모세의 이야기도 그렇고 감독은 왜 꾸준히 섹션에 불편함을
선사하는 걸까. 어떤이의 소신이 그가 한 개인적 불편한 일로 희석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다고 그 소신마저 그릇된 것인가는
스스로 판단해볼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힘들겠지만 우리는 많은 생각해봐야한다. 갈등이 풀어지는건 우리가 스스로를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때에 한한다. 적들은 우리가 생각을 하지않을때 가장 희열을 느낀다.
4. 요리 섹션 : 경찰서의 요리사(로벅 라이트)
경찰서의 요리사인 네스카피에(한국계 미국인인 스티븐 박이 연기했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도 볼 수 있다 머리스타일에 영향을 준게 봉준호 감독의
어린시절…)를 인터뷰하는 도중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서장의 아들인 지지가 납치 된것이다.
얼결에 로벅 라이트는 지지를 구하는 이 긴박한 현장에 들어가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하게 된다.
헌데 이게 대체 요리 섹션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여기서 로벅 라이트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동성애자였이고 외국에서온 이방인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 유흥을 즐긴것 뿐인데 어느날 경찰서의 '닭장(구치소를 이렇게 비유한다)'에 갇히고 말았다. 사랑을 했을뿐인데 말이다.
이방인으로 연줄도 없었던 로벅 라이트는 자신의 기억력으로 기억해낸 '구직했지만 실패했던 직장'이었던 프렌치 디스패치에 전화를 건다. 그랬더니 편집장인 아서가 정말로 찾아와 그를 다시 인터뷰하려는게 아닌가.
아서는 오는 차안에서 그의 글을 다시 읽었고, 좋은 글이었다며 그에게 세저랙의 책을 주며 석방절차에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 독후감을 쓰라 말한다. 이는 프렌치 디스패치에 고용하기위한 절차였기도하지만 그에게 구치소의 환경을 조금이나마 잊게해줄 그 나름의 위로도 되었을 것이다.
로벅 라이트는 이때 심정이 어땠을까? 위에서도 썼지만 그가 가진 조건은 때론 현실에서도 있을 곳을 제약하기도 한다. MC는 그에게 왜 요리에 대해 많이 쓰냐고 한다. 그가 말하길
거기에는 절 위한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There was a table. Set for me)
그러니 있을 곳이 없었을때 그의 자리를 만들어준 아서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영화에서 'no crying'은 아서의 캐치프레이즈인데, 그래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는 몇컷에서 의미가 극대화된다.)
아서는 글을 읽고 후반부에 말한다. 인터뷰하기로 한 네스카피에의 얘기는 어디있느냐고. 영화를 봤다면 우리는 지지의 구출작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건 네스카피에의 희생이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벅 라이트는 네스카피에의 인터뷰 부분을 슬퍼서 싣지않으려한다. 인터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독을 먹었던 이유에 대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네스카피에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 낯선 앙뉘에 정착한 동양인이며, 경찰을 하고있으나 요리마저 해내야했던 인물이다. 결국 그가 위험을 감수한 것도 스스로 있을 곳을 지키기위한 행위였다.네스카피에는 머금었던 독의 풍미에 대해 말한다. 어쩌면 그건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던 그리움에 대한 향수와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벅 라이트는 등장인물들중에 그에게 유일하게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를 싣지않으려했던건 행여냐 네스카피에가 있을 자리를 그가 망쳐버리면 어쩌나하는 불안감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항상 필진을 존중해주는 아서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기에 반드시 실어야한다'고 말한다. 로벅 라이트는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아서의 고집은 완강하다.
결국 이 이야기가 실렸을지 어땠을지는
우리는 모른다. 다만 어떤 선택이든 우리는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다.
5. 마무리 : 글의 힘
객관적인 글이란건 존재할까? 사실을 적어두더라도 그 사실이 후에 부정된다면 그건 객관적인 글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더러있다.
프렌치 디스패치에 실린 글들의 주인공은 다양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논란이 되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대상들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기자들또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결국 글을 쓰는 주체든 글의 주제가 되는 객체든 모두 사회의 구성원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 같지만 두가지를 인상깊게 보았다.
하나는 편집장으로서 독자를 신경쓰면서도 필진의 불편한 글들마저 살리려는 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다.
그가 신경쓰는건 소위 권위자나 불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삶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걸 불편해할지 안할지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글 자체에 공감할 수 없어도 일부에는 공감할 수 있고 이는
외부의 힘이나 편집장의 권한이 아닌 독자와 글, 둘만의 역할로만 두는 것이다. 아서의 존중방식은 비록 직원에게는 그리 적용되지 않지만, 사회에서 아무리 저속하고 배제되었다 하더라도 글을 쓴 대상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필진을 존중하듯 필진이 쓴 대상 또한 존중한다. 그렇게 아서는 지금껏 세계를 한 장소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가 굳이 관여할 정도로 독자나 필진, 대상은 나약하지 않다.
그는 그저 돈에 대한 리스크만 짊어지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가급적 실으려 노력할뿐.
그렇기에 필진은 자기 자신의 시각을 반영한 글을 쓸 수 있으며 독자는 또 새로운 시점의 세계를 접하고 현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내가 가졌던 생각이 전부 옳은가에 대해서.
또 다른 하나는 상사이면서 멘토로서의 역할이다. 그가 죽었음에도 그의 사무실에서는 그의 룰이 적용된다. 고인에 대한 존중에 앞서 그의 영향력이 직원이나 필진들에게 아직까지 미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아서의 죽음은 단순히 잡지 하나의 폐간만으로 끝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아서를 두고 모여 부고문을 작성한다. 아서의 역할은 결국 과거로 끝나는게 아니라 미래에도 적용되며,
모여있는 사람들은 아서를 기억하며 저마다 살아갈 것이다. 아서는 죽어서까지도 사람을 모은 것이다.
현실에서 작가를 보호해야하는 위치에서 돈의 논리로 작가를 내치는 경우도 많이보고, 사회를 통합해야하는 위치에서 오히려 입맛에 맞는 사람만 배치하려는 경우도 많이 본 2024년이었다. 암울한 현실에 영혼이 허무해질때 문득 내가 가장 사랑하던 이 영화가 생각났다.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경쾌한 음악,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 배우들
모든 것이 완벽하지만
내가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글’이며,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엮인
서사 그 자체였다.
지금도 난 이 영화를 라디오처럼 통째로 몇번이고 돌려본다. 그게 나를 올 한해 일으킨 힘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내년에는 모두가 자신이 있을 곳을 찾고,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출처
The french dispatch by matt zoller seitz
The french dispatch 대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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