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를 추구하는 꿈에 젖은 시인을, 어느 날 어떤 모퉁이에 몰아세우고는 살점을 물어 뜯을 개들은 항상 존재한다.
내가 보았던, 지켜봤던 수만 마리의 개는 이 세상에서 내 앞에 있을 때만 아름다웠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지금, 저기에서, 여기에서 우리 앞에 있는 것, 나중에 모두들 가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쓴 에세이 모음집.
이런 류의 책 중에서 탑으로 재미있었다!
작가의 넓은 지식을 우선 피력하기보다는
일상, 평소 생각하는 소재나 독서리뷰 그리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서양과의 괴리, 튀르키예에 일어난 비극에 대한 르포에 가까운 글까지 - 좋은 의미에서 잡지를 한 권 보는 것 같았다. 이걸 혼자 썼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2.3 사태때, 튀르키예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계엄이 성공한 군정 상태라는 걸 알았다. 실패해서 우스갯소리처럼 넘길뿐 우리에게도 올 수 있던 상황이었으며, 지금 누리는 문화도 하마터면 먼 미래의 일이 될 수 있었던거다. 그의 글은 단순히 우아하게 구가하는 문학이 아닌 조용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살던 골목으로 들어가 먼발치에서 보니 우리 집이 없더군요. 열두 살짜리 소녀가 그 집 밑에 깔려 있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듯 조용하게 말했고, 별로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중에 내 친구는, 한 영국인은 휴가내내 비가 왔다고 10년 동안 불평했는데, 집이 없어진 이 남자는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국 문학에 한계를 느껴 해외 문학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 점, 그러면서 튀르키예 자국의 문제와 이웃에 세세한 관심을 표하는 점(미국에서 스쳐지나가는 튀르키예인 화가나 자국에서 죽었다 여겨지는 우연히 만난 친구의 얘기를 소설의 한 구절처럼 적어둔 게 인상깊었다) - 어떤 글에서는 딸을 아끼는 아버지가 되고, 어떤 글에서는 기자가 되며, 어떤 글에서는 집필실 안의 소설가가 된다. 몇가지 예시를 적어보자면…
튀르키예 대지진 당시 피해를 겪은 여성에 대해 쓴 인상깊었던 부분.
“지진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며 무척 두려워하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매 순간을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시는 군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태니까요. 하지만 이 두 생각은 서로 모순돼요. 예를 들면 지진이 날 때 발코니에 있는 건 아주 위험하다는 걸 이제 우리는 다 알지요, 그럼에도 저는 발코니로 나가요.”
“이렇게 해서 발코니에 서 있는 동안 제 머릿속에 있는 지진에 대한 생각에 맞서 작은 승리를 거뒀어요. 이러저러한 작은 승리들로 우리 모두 대지진을 이겨 내야죠.”라고 덧붙였다.
소장한 책을 줄여나가는 부분(개인적으로 무척 공감됨)
서재가 나에게 주는 믿음, ‘집에 있는 듯한’ 느낌은 아주 소수의 책에서만 느꼈으면 좋겠다.
영혼 역시 텍스트 속에 전적으로 몰입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성에서 아주 한정된 책만을 사랑하게 된다. 가장 좋은 서재는, 서로를 질투하는 이런 한정된 책들로만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로 자국과 충돌하는 상황에 대한 언급
첫눈에도 뭐든 것이 ’환상적 사실주의‘로 쓰인 소설에 나오는 과장돤 장면들은, 자신의 책을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작가의 꿈을 연상시킨다. 삶의 대부분을 인도 뭄바이에서 보낸 후 영국 런던네서 이주민으로 사는 삶에 대해 쓴 소설은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금서가 되었다. 소설과 작가에 대해서, 혹은 그 이상으로 책이 출간되고 판매된 미국과 영국에서 반대하는 시위도 일어났다. 책을 파는 서점은 위협을 받았고, 광장에서는 책과 작가의 꼭두각시가 불태워졌으며, 호메이니는 소설가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우리는 서술자가 가난한 나라에 있는 ‘무슬림의 어린 시절’에서 멀어잘수록, 주인공들과 함께 변신, 분노, 언어 그리고 문화의 전환을 겪는 것을 목격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살라딘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찬게즈는 이제 영국인처럼 된 아들 살라딘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돌려 말한다. “만약 자신의 민족을 혐오하려고 외국에 갔다면, 그 만족도 너에게 분노 이외에 다른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상의 자유가 그리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분노하며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인간의 존엄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 셈이다. 이제,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며, 나아가 가혹하게 폭격을 하며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가져다 주려고 한다는 게 얼마나 ‘논리적’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의 죄명은 “터키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모독한 죄.” 검사는 내게 징역 3년을 구형할 것이다.
장군, 경찰 그리고 성인 들은 살아생전 기회가 될 때마다 존경받지만, 작가들을 법정과 감옥에서 오랫동안 살게 하고는 장례식 예배 직전에 명예롭게 해 주는 나라에서 살아왔기에 이 소송이 제기된 것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서양 밖에 부르주아 혹은 부유해진 관료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새로운 엘리트들은, 마치 터키의 서구화주의 엘리트들처럼, 자신들의 힘과 부유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한다고 믿는다. 빠르게 증가하는 놀라운 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양의 언어와 스타일을 배우고, 자기 나라는 이런 자식이 필요하다고 자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것…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충분히 ‘민족적’ 혹은 국내적이지 않다는 자기 민족의 비판에 응하기 위해 강력하고 편협한 민족주의를 정치적 깃발로 삼는 것.
그런 생각을 했다. 소위 ‘강대국’에서 쓰여지는 소설은 그 주제가 참으로 다양하다. 자국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그 한정적인 주제가 매우 안타까웠을 것이다. 슬픈 상황에서도 꽃은 아름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음식은 맛있다. 자국의 자아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 가지는 자유들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제약이 되어야할까. 그릇된 것을 그릇되게 쓰는 것 또한 소설이 가지는 특권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노골적으로 그릴 수 없기에 작가는 소설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더라도 상상력으로 많은 제약을 뛰어넘을 수단 중의 하나이니까.
한국에 대해 한두번 나오기하는데, 그중에 인상깊었던건 이 부분.
올해 5월에 한국에서 만났던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군대가 중국과 한국을 점령했을 당시 저지른 끔찍한 죄에 대해 도쿄에서도 언급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튀르키예의 상황이 하루 빨리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책이 번역될 당시에는 터키가 용인되어 구절도 그렇게 쓴 점은 양해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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