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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계획

028. 반전


인어들의 웅성거림이 멈췄다. 지갑안에서 일레인은 자신이 수호부처럼 여긴 - 증조모가 남겨준 깨진 수정구슬 조각의 일부를 꺼내들었고, 그 재질을 알아봤던 인어들은 단번에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당연하지만 흥분해서 외면했던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만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는 것이다.

관리인의 존재는 인간이긴 하지만 여왕에게 직접 자리를 임명받은 특이한 케이스였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어도 소문으로는 들려왔던 존재였다 - 인어들은 비록 소문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않았지만 여왕 측에서 전한 소식으로 특별한 존재를 개념으로나마 이해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달랐다, 그녀가 만일 마녀가 아닌 인간이라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애시당초 너머에 올만한 인간은 죽거나, 죽기 직전인 인간뿐이니까.

게다가 수정은, 검은색의 혼탁한 수정은 특히나 흔히 볼 수 있는게 아니었다. 마녀들이 저마다 마력을 저장하는 특이한 수정을 가졌다는 소문은 꽤 유명했다. 인어들은 사실과 진실여부가 불분명한 소문을 무의식중에 결합했고 - 곧 일레인이 정말 마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문제는 관리인이었다. 그는 일레인의 지갑에서 나온 수정이 어디서 온것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희미했던 기억은 단박에 선명해졌으나 그만큼 상처도 아려왔다. 정말 눈앞의 일레인이 그녀의 증손녀라면 현재의 관리인에게서 그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일레인이 마녀고, 관리인의 의도가 밝혀졌으니 남은건 정말 그들 말대로 ’내통자‘가 존재하냐는 것이었다. 행여나 허튼말로 동족의 배신자로 오해받을까 다들 말을 삼갔다. 지친 인어들은 구석에서 숨죽이며 울고 있었다. 트래펄은 작전을 바꿔 인어연안에서 그들을 내쫓기로 마음먹었다. 인어들 정도는 자신이 쉬이 설득할 수 있다.

그때 무언가가 트래펄의 뒤를 덮쳤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인지라 건장했던 그도 저도 모르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침을 질질 흘리는 늙은 홉고블린 한마리가 그의 등뒤에 붙어있었다. 일레인은 놀라 총을 꺼내 위협사격을 하려했으나 워낙 엎치락뒤치락하며 위치가 금방 바뀌어서 겨냥하기 쉽지않았다. 그러나 늙은 홉고블린의 목적은 확고했다. 그는 트래펄의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목을 물어뜯었다. 트래펄은 비명을 질렀다.

“오 매저리! 나의 여신! 내 삶의 빛!”

관리인은 홉고블린을 트래펄에게서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있는데 왜 인어 따위와? 왜? 왜 날 배신한거지?“

그러나 홉고블린은 자신의 이 일의 원흉이라는 것도 까마득하게 잊은 채로 울부짖었다. 트래펄은 비명을 지르며 인어연안 밖으로 나갔다. 인어들은 놀라 반이상이 바다속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바다 근처까지 피신한 다음 상황을 지켜보았다. 홉고블린은 관리인을 짓누르면서 일레인에게 달려가려했다.

일레인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로드모어를 가련하게 여겨 그를 구할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 그녀를 이곳으로 이끈 근원적 공포는 이미 몸에 새겨져있었다. 그리하여 한발, 두발 - 각각 달려오는 적의 급소에 겨누어졌다. 로드모어는 허무하게 고꾸라졌다.

상황은 이 이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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